#버스여행#2박3일#완주#고창#정읍#장성

[버스여행] 황금연휴엔 전라도, 전라도 순회 탐방여행 (2박3일)

상품정보
·출발일 08월 15일(금), 10월 03일(금)
·여행기간 2박 3일
·적립포인트 270 point (예약 1건당 1회 적립)
·최소출발인원 25명
·모이는 장소 용산역 1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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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0,000원~
  • 소인
    27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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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여행] 황금연휴엔 전라도, 전라도 순회 탐방여행 (2박3일)
    1일차
    일정표

    07:00 용산역 1번출구/ 4호선 신용산역 3번출구 잔디밭 앞

    07:20 2,3호선 교대역 9번출구 앞

    07:30 동천역 환승정류장

    07:40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죽전정류장

    07:45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신갈정류장  

    07:00

    서울 출발 - 군산 도착

    11:50

    중식제공(우쭈쭈 덮밥정식)

    13:00

    군산 근대 역사관&군산 근대역사거리

    - 과거와 현재, 독립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공간

    16:40

    선운사

    - 풍부한 역사와 문화재, 사계절 각기 다른 자연 경관이 어우러진 명소

    선운사(고창)
    선운사는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도솔산(兜率山)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선운사의 창건은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이야기와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 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진흥왕(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 및 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으며, 이후 그 자리에 선운사를 창건하였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한다.

    현재 선운사에는 보물 8점, 천연기념물 3점,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1점,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3점 등 총 25점이 있다. 특히 대웅전 뒤에는 수령 약 500년, 높이가 평균 6m는 되는 동백나무들의 군락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꽃이 만개하는 봄이면 사찰 뒤로 꽃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장관을 이루고, 선운산의 동백숲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중순경 동백연예술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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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0

    익산 왕궁리유적

    - 사찰로 쓰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은 마한 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 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 장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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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0

    석식제공(모양성 순두부+육전반판+두부)

    19:10

    숙소 입실 및 휴식

    2일차
    일정표
    08:00

    기상 및 조식(바지락죽)

    09:00

    고창읍성

    - 조선 단종 때 왜구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건축물

    고창읍성
    고창은 우리나라에서 군 단위로는 최대의 고인돌 밀집 지역이다. 고창읍성(모양성)과 선운사, 그리고 동리 신재효와 미당 서정주의 고장인 고창은 삼한시대인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의 시초로 열리기 시작,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 또는 ‘모양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이래 ‘고창현’으로 불렸다. 고창은 방장산을 긴 노령산맥을 등허리에 안고, 서해에 연해지면서 자리한 고을터이다. 특히 고창은 전북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 여맥이 이어져 일으켜 세운 곳이다. 방장산이 좌우로 펼쳐져 고창군 일대를 광활한 대지로 만든다. 고창은 풍수지리학상, 오행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드문 지역으로 동쪽과 남쪽이 높은 반면 서북쪽이 낮게 형성되어 통풍과 햇빛이 골고루 퍼져 농작물 재배는 물론 인간의 두뇌 형성에도 아주 좋은 인맥의 고장이자 예향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기도 하다. 고창의 산야는 전라북도의 다른 시군에 비해 낮은 야산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 비산비야 지역이다.

    * 연혁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호국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65년 4월 1일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 축성 목적
    산성은 성과 연결이 잘 되는 곳에 축성하게 되는데, 고창읍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입암산성이 있으며, 입암산성은 나주진관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호남내륙에서 한양에 갈 때는 노령산맥인 갈재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갈재는 험준하고 봉변을 주는 곳이었다. 이러한 곳을 지키고 영광, 고창, 장성 등 부근 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을 법성포를 통해 반출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입암 산성이 담당했었다.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도 입암산성에서 막아야 하는데, 입암산성과 법성포와 고창, 영광지역은 너무 멀어 입암산성의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해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창읍성은 이런 이유로 축성되었고 호남내륙을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지켜왔다.

    * 축성방식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 듯한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가끔 끼어 있다. 특히 북문인 공북루의 주춧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온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

    * 고창읍성의 특징
    조선시대의 읍성들은 평야 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 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창읍성만은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 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계유년(1453)에 전라 좌, 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 답성(성밟기)놀이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 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 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 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부녀자들 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 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 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 수문장 재현
    음력 9월 9일을 전후하여 4일간 ‘모양성제’가 열리며, 이때 조선시대 관군복장을 갖춘 수문장이 고창읍성을 수호하는 장면을 재현된다. 고창 읍성의 성곽 주위에 수십 개의 옛 진영 깃발을 꽂아 고을수령(현감)이 재임하던 시절 관아의 위엄을 갖춰놓고 형형색색의 멋진 조선시대 관군복에 칼을 든 수문장과 흑백색의 순라복장에 창을 든 포졸을 공북루에 배치했다. 특히, 스스로 관군이 되어보기를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관리사무소에 관군복을 비치해 놓고 이를 빌려줌으로써 사진촬영을 통해 관군으로서의 체험도 직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마련해 놓고 있다.

    ▶ 척화비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 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 라는 뜻이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우 신미년에는 미국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 관아건물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성곽과 건물 14동을 복원·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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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0

    판소리박물관

    - 전통 판소리 문화를 체계적으로 보존·전시

    11:20

    장성호 출렁다리

    - 흔들다리와 산책하며 자연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산책로

    12:30

    중식제공 (해물 짬뽕 쟁반짜장)

    14:00

    무성서원

    -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을 담당한 대표적인 사립 서원

    무성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무성서원은 신라말 유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재임 중 쌓은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생존해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창건하여 태산사라 하였다. 고려 말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그 뒤 1549년(명종 4) 신잠의 생사당을 짓고 태산사에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송세림·정언충·김약묵, 1675년(숙종 1) 김관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개편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현가루·명륜당·장수재·흥학재·고사 등이 있다.
    무성서원은 그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인 고현동향약을 시행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항거하여 1906년 면암 최익현을 맹주로 호남 최초의 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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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0

    석식제공(누룽지삼계탕)

    19:20

    숙소 입실 및 휴식

    3일차
    일정표
    08:00

    조식제공(돌솥밥)

    09:30

    아가페정원

    - 차분한 휴식과 감성을 채우고 싶을 때 최적의 장소

    아가페정원
    아가페정원은 전라북도 제4호 민간정원으로 메타세쿼이아, 섬잣나무, 공작단풍 등 수목 17종 1,416주기 등재되어 있다. 1970년 故 서정수 신부가 노인복지시설인 아가페정양원을 설립하였으며, 시설 내 어르신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를 위해 자연친화적인 수목 정원을 조성하였다. 정원 자체가 수목원처럼 잘 가꾸어진 늘 푸른 숲을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휴식과 정서함양을 제공하고자 2021년 3월 민간정원으로 등록한 후, 정비사업을 거쳐 시민쉼터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계절마다 수선화, 튤립, 목련, 양귀비 등 아름다운 꽃의 향연이 이어지고, 하늘 높이 뻗은 메타세쿼이아가 울타리처럼 조성된 산책길이 인상적이며, 향나무, 소나무, 오엽송, 공작단풍, 백일홍 등의 관상수로 이어진 숲길을 걷다 보면 자연의 싱그러운 공기와 주변의 풍경이 어우러져 그윽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주말 및 공휴일 방문 시에는 방문 2주 전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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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0

    익산 교도소세트장

    - 실제 감옥과 거의 흡사한 리얼함과 오픈형 체험 콘텐츠

    익산교도소세트장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성당초등학교 남성분교 폐교부지 위에 세워진 국내 유일의 영화 촬영용 교도소 세트장이다. 이곳에서 영화 ‘홀리데이’의 현실감 넘치는 교도소 장면이 연출되었고, 이외에도 ‘아이리스’,‘전설의 마녀’, ‘7번 방의 선물’,‘내부자들’ 등 20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었다. 교도소 세트장에 들어가면 ‘영화가 탄생하는 마술상자’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입구에는 그동안 촬영된 영화 포스터들을 전시하고 있다.
    세트장은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건물 내부와 외벽에는 교화에 필요한 문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국내 유일의 영화촬영용 교도소인 이곳은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운동장에 깔린 천연잔디는 관광객들의 휴식공간과 포토존으로 인기가 많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한국에서 유일한 영화 촬영용 교도소 세트장으로 드라마 <이로운 사기>, <신성한 이혼>, 영화 <타짜>, <7번 방의 선물> 등을 촬영했다. 폐교를 활용해 만든 세트장이지만 법정, 독방, 취조실, 고문실 등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오싹해진다. 의상을 대여해 교도관이나 죄수가 되어 보면 더 실감 나게 교도소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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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0

    중식제공(쭈꾸미 정식)

    13:00

    익산 출발

    15:40

    완주 송광사

    - 문화재가 5개 있는 완주의 역사가 깊은 사찰

    송광사(완주)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종남산에 있는 사찰이다. 송광사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 체징 선사가 설악산 억성사에서 수행하다 중국에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가 영험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잠시 머물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련사는 종남산 남쪽에 있는 영험한 샘물 옆에 지은 절이라고 한다. 체징 선사가 귀국한 후, 백련사를 송광사로 개칭했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전소되었고, 1636년부터 벽암 각성대사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가람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송광사는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약사전, 관음전, 십자각, 금강문, 향로전, 적묵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경내에 있는 문화재로는 완주 송광사 종루,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송광사 동종, 송광사 사적비 등이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템플스테이와 불교 학당이 있다. 불교 학당은 바른 불교적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사상을 폭넓게 탐구하며, 불교적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불교 학당은 1학기와 2학기로 구분되어 각 학기당 16주 동안 강의를 진행한다. 강의를 통해 초기불교의 이해, 대승불교의 이해, 중론 강독 등의 강좌를 수강할 수 있다. 템플스테이는 당일형, 체험형, 휴식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새벽예불, 108배, 참선, 스님과의 다담을 통해 항상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과 정신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을 가만히 보듬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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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0

    서울 도착

    예약 Tip
여행코스/포함/불포함
여행코스 서울→ 군산→ 군산 근대역사관& 근대역사거리→ 선운사→ 1박→ 고창읍성→ 판소리 박물관→ 장성호 출렁다리→ 무성서원→ 완주 송광사→ 익산 왕궁리유적→ 1박→ 아가페정원→ 익산 교도소세트장→ 서울
포함내역 왕복 버스, 숙박비, 7식, 입장료 , 인솔 가이드
불포함내역 여행자보험 , 기타개인경비
출발일선택 & 예약하기  
  • 출발확정
  • 예약가능
  • 예약마감
1일차
일정표

07:00 용산역 1번출구/ 4호선 신용산역 3번출구 잔디밭 앞

07:20 2,3호선 교대역 9번출구 앞

07:30 동천역 환승정류장

07:40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죽전정류장

07:45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신갈정류장  

07:00

서울 출발 - 군산 도착

11:50

중식제공(우쭈쭈 덮밥정식)

13:00

군산 근대 역사관&군산 근대역사거리

- 과거와 현재, 독립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공간

16:40

선운사

- 풍부한 역사와 문화재, 사계절 각기 다른 자연 경관이 어우러진 명소

선운사(고창)
선운사는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도솔산(兜率山)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선운사의 창건은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이야기와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 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의 진흥왕(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 및 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으며, 이후 그 자리에 선운사를 창건하였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한다.

현재 선운사에는 보물 8점, 천연기념물 3점,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1점,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3점 등 총 25점이 있다. 특히 대웅전 뒤에는 수령 약 500년, 높이가 평균 6m는 되는 동백나무들의 군락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꽃이 만개하는 봄이면 사찰 뒤로 꽃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장관을 이루고, 선운산의 동백숲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중순경 동백연예술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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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

익산 왕궁리유적

- 사찰로 쓰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은 마한 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 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 장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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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

석식제공(모양성 순두부+육전반판+두부)

19:10

숙소 입실 및 휴식

2일차
일정표
08:00

기상 및 조식(바지락죽)

09:00

고창읍성

- 조선 단종 때 왜구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건축물

고창읍성
고창은 우리나라에서 군 단위로는 최대의 고인돌 밀집 지역이다. 고창읍성(모양성)과 선운사, 그리고 동리 신재효와 미당 서정주의 고장인 고창은 삼한시대인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모로비리국"의 시초로 열리기 시작, 백제 때에는 ‘모량부리현’ 또는 ‘모양현’으로 불렸고 고려시대 이래 ‘고창현’으로 불렸다. 고창은 방장산을 긴 노령산맥을 등허리에 안고, 서해에 연해지면서 자리한 고을터이다. 특히 고창은 전북의 삼신산 중 하나인 방장산 여맥이 이어져 일으켜 세운 곳이다. 방장산이 좌우로 펼쳐져 고창군 일대를 광활한 대지로 만든다. 고창은 풍수지리학상, 오행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드문 지역으로 동쪽과 남쪽이 높은 반면 서북쪽이 낮게 형성되어 통풍과 햇빛이 골고루 퍼져 농작물 재배는 물론 인간의 두뇌 형성에도 아주 좋은 인맥의 고장이자 예향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기도 하다. 고창의 산야는 전라북도의 다른 시군에 비해 낮은 야산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 비산비야 지역이다.

* 연혁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호국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65년 4월 1일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 축성 목적
산성은 성과 연결이 잘 되는 곳에 축성하게 되는데, 고창읍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입암산성이 있으며, 입암산성은 나주진관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호남내륙에서 한양에 갈 때는 노령산맥인 갈재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갈재는 험준하고 봉변을 주는 곳이었다. 이러한 곳을 지키고 영광, 고창, 장성 등 부근 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을 법성포를 통해 반출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입암 산성이 담당했었다.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도 입암산성에서 막아야 하는데, 입암산성과 법성포와 고창, 영광지역은 너무 멀어 입암산성의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해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창읍성은 이런 이유로 축성되었고 호남내륙을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지켜왔다.

* 축성방식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 듯한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가끔 끼어 있다. 특히 북문인 공북루의 주춧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온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

* 고창읍성의 특징
조선시대의 읍성들은 평야 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 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창읍성만은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 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계유년(1453)에 전라 좌, 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 답성(성밟기)놀이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 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 고 한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되어 있다. 고창 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부녀자들 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 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 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 수문장 재현
음력 9월 9일을 전후하여 4일간 ‘모양성제’가 열리며, 이때 조선시대 관군복장을 갖춘 수문장이 고창읍성을 수호하는 장면을 재현된다. 고창 읍성의 성곽 주위에 수십 개의 옛 진영 깃발을 꽂아 고을수령(현감)이 재임하던 시절 관아의 위엄을 갖춰놓고 형형색색의 멋진 조선시대 관군복에 칼을 든 수문장과 흑백색의 순라복장에 창을 든 포졸을 공북루에 배치했다. 특히, 스스로 관군이 되어보기를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관리사무소에 관군복을 비치해 놓고 이를 빌려줌으로써 사진촬영을 통해 관군으로서의 체험도 직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마련해 놓고 있다.

▶ 척화비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 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 라는 뜻이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우 신미년에는 미국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 관아건물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성곽과 건물 14동을 복원·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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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판소리박물관

- 전통 판소리 문화를 체계적으로 보존·전시

11:20

장성호 출렁다리

- 흔들다리와 산책하며 자연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산책로

12:30

중식제공 (해물 짬뽕 쟁반짜장)

14:00

무성서원

-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을 담당한 대표적인 사립 서원

무성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무성서원은 신라말 유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재임 중 쌓은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고려시대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생존해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창건하여 태산사라 하였다. 고려 말에 쇠약해졌다가 1483년(성종 14)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그 뒤 1549년(명종 4) 신잠의 생사당을 짓고 태산사에 배향하였으며, 1630년(인조 8) 정극인·송세림·정언충·김약묵, 1675년(숙종 1) 김관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병합한 뒤 [무성(武城)]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개편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그 뒤 계속적인 중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사우·현가루·명륜당·장수재·흥학재·고사 등이 있다.
무성서원은 그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인 고현동향약을 시행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항거하여 1906년 면암 최익현을 맹주로 호남 최초의 의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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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

석식제공(누룽지삼계탕)

19:20

숙소 입실 및 휴식

3일차
일정표
08:00

조식제공(돌솥밥)

09:30

아가페정원

- 차분한 휴식과 감성을 채우고 싶을 때 최적의 장소

아가페정원
아가페정원은 전라북도 제4호 민간정원으로 메타세쿼이아, 섬잣나무, 공작단풍 등 수목 17종 1,416주기 등재되어 있다. 1970년 故 서정수 신부가 노인복지시설인 아가페정양원을 설립하였으며, 시설 내 어르신들의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를 위해 자연친화적인 수목 정원을 조성하였다. 정원 자체가 수목원처럼 잘 가꾸어진 늘 푸른 숲을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휴식과 정서함양을 제공하고자 2021년 3월 민간정원으로 등록한 후, 정비사업을 거쳐 시민쉼터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계절마다 수선화, 튤립, 목련, 양귀비 등 아름다운 꽃의 향연이 이어지고, 하늘 높이 뻗은 메타세쿼이아가 울타리처럼 조성된 산책길이 인상적이며, 향나무, 소나무, 오엽송, 공작단풍, 백일홍 등의 관상수로 이어진 숲길을 걷다 보면 자연의 싱그러운 공기와 주변의 풍경이 어우러져 그윽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주말 및 공휴일 방문 시에는 방문 2주 전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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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

익산 교도소세트장

- 실제 감옥과 거의 흡사한 리얼함과 오픈형 체험 콘텐츠

익산교도소세트장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성당초등학교 남성분교 폐교부지 위에 세워진 국내 유일의 영화 촬영용 교도소 세트장이다. 이곳에서 영화 ‘홀리데이’의 현실감 넘치는 교도소 장면이 연출되었고, 이외에도 ‘아이리스’,‘전설의 마녀’, ‘7번 방의 선물’,‘내부자들’ 등 20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었다. 교도소 세트장에 들어가면 ‘영화가 탄생하는 마술상자’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입구에는 그동안 촬영된 영화 포스터들을 전시하고 있다.
세트장은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건물 내부와 외벽에는 교화에 필요한 문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국내 유일의 영화촬영용 교도소인 이곳은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운동장에 깔린 천연잔디는 관광객들의 휴식공간과 포토존으로 인기가 많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한국에서 유일한 영화 촬영용 교도소 세트장으로 드라마 <이로운 사기>, <신성한 이혼>, 영화 <타짜>, <7번 방의 선물> 등을 촬영했다. 폐교를 활용해 만든 세트장이지만 법정, 독방, 취조실, 고문실 등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오싹해진다. 의상을 대여해 교도관이나 죄수가 되어 보면 더 실감 나게 교도소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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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중식제공(쭈꾸미 정식)

13:00

익산 출발

15:40

완주 송광사

- 문화재가 5개 있는 완주의 역사가 깊은 사찰

송광사(완주)
송광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종남산에 있는 사찰이다. 송광사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 체징 선사가 설악산 억성사에서 수행하다 중국에 유학을 가던 길에 백련사가 영험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잠시 머물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련사는 종남산 남쪽에 있는 영험한 샘물 옆에 지은 절이라고 한다. 체징 선사가 귀국한 후, 백련사를 송광사로 개칭했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전소되었고, 1636년부터 벽암 각성대사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가람으로 크게 중창하였다.
송광사는 대웅전을 비롯해 지장전, 약사전, 관음전, 십자각, 금강문, 향로전, 적묵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경내에 있는 문화재로는 완주 송광사 종루,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송광사 동종, 송광사 사적비 등이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템플스테이와 불교 학당이 있다. 불교 학당은 바른 불교적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사상을 폭넓게 탐구하며, 불교적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불교 학당은 1학기와 2학기로 구분되어 각 학기당 16주 동안 강의를 진행한다. 강의를 통해 초기불교의 이해, 대승불교의 이해, 중론 강독 등의 강좌를 수강할 수 있다. 템플스테이는 당일형, 체험형, 휴식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새벽예불, 108배, 참선, 스님과의 다담을 통해 항상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과 정신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을 가만히 보듬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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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서울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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